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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추가정보)

R.I.P. 비비안 웨스트우드, 고인의 개쩌는 삶을 회고하며.

by 크림슨 킴 2023. 1. 3.

제목 때문에 화난 이들이 충분히 있을 법하다.

충분히 고인모독처럼 보일 법 하니까.

하지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하면, 분명 하늘에서의 그녀도 이 단어 선택에 만족스러워할 것이라 확신한다.

미사여구 필요없이 사진 한 장으로 대체하고, 본론으로 넘어간다.

 

로큰롤!                                                                                       2017년 런던 패션위크에서의 비비안 웨스트우드.

 

 

탄생부터 초혼까지

 

그녀는 1941년 4월 8일, 영국의 평범한 가정의 장녀로 태어났다.

의외로 그녀의 본명은 <비비안 이자벨 스와이어(Vivienne Isabel Swire)>였다.

1950년대의 어릴 적부터 그녀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교복을 리폼하고, 옷을 만들어입었다.

이 기세를 연이어 예술대학교에 입학했지만,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혀 한 학기만에 그만두고 만다. 

이후 교사가 되기 위한 노력을 기하던 1962년, 첫 남편을 만나게 된다.

당시의 결혼식에도 그녀의 드레스는 자기 자신의 수작업으로 제작되었는데, 이 대목에서도 그녀의 비범한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

남편의 이름이 실로 놀라운데, 바로 데렉 웨스트우드(Derek Westwood)다.

그렇다. 그녀의 웨스트우드라는 성은 첫 남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데렉과 평생을 함께했다면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겠지만, 데렉과는 겨우 65년에 이혼한다.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들 벤 웨스트우드 때문이었는지.

혹은 그저 웨스트우드의 어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눈 감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비비안 웨스트우드'라는 이름을 고집하게 된다.

 

 

말콤 맥라렌

 

그녀의 인생을 바꾸었던건 1965년 말콤 맥라렌(Malcolm McLaren)과의 만남이었다.

그는 상징적인 반골로, 이후 세계적인 록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가 되기도 했다.

비비안의 반항적인 태도와 펑키한 무드는 그와 영향에서 빛을 발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의 자서전에서 “나와 말콤 이전엔 펑크가 없었다. 펑크는 완전히 폭발적이었다”라고 밝힐 정도였으니 말이다.

서로에게 푹 빠져든 두 사람은 커플이 되어, 이내 사실혼 관계가 된다.

 

말콤 맥라렌과 비비안 웨스트우드. 프린팅도 보통이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1971년, 빈티지 옷과 비비안 웨스트우드 자체제작 옷을 판매하는 ‘락을 허용하라(Let it Rock)’라는 의류 가게를 오픈하게 된다.

이후 잠시간 ‘살기엔 너무 빠르고 죽기엔 너무 어리다.(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라는 이름으로 오토바이 의상을 판매하기도 했다.

펑크 패션의 대모가 공식적으로 패션계에 데뷔하는 순간이었다.

 

 

섹스- 피스톨즈

 

1974년, 말콤과 비비안의 가게명은 무려 '섹스(SEX)'로 변신한다.

 

당시의 가게 간판.

 

문 앞에는 ‘재주라는 것은 옷을 필요로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란 벌거벗은 것이다.(Craft must have clothes but Truth loves to go naked.)’라고 적혀 있었다.

인테리어로도 포르노그래피 그래피티가 뿌려져 있는 등, 충격의 연속이었다.

지금 들어도 당황스러운 가게명은 당시로써는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특히나 그녀의 가게를 밥먹듯이 드나들던 단골들이 있었다.

말콤은 일종의 가게 홍보수단으로 그들을 적당히 모아서 뮤지션으로 만들고자 공고를 내기로 했다.

그렇게 결성된 엉터리 밴드는 의외의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다.

비비안은 그들의 의상을 디자인해주었으며, 이 영향으로도 그녀는 성공가도에 올라탈 수 있었다.

여담으로, 67년 경에 말콤과의 사이에서 막내이자 둘째 아들인 조셉 코르가 태어났다.

아들 또한 디자이너로 발돋움하여 이후 패션 컬렉션을 런칭하기도 하였다.

 

 

해적, 그리고 결별

 

70년대가 그녀의 데뷔였다면 80년대는 그녀의 유명세를 의미한다.

1981년, 해적(Pirate)이라는 이름으로 말콤과 함께 첫 번째 패션쇼를 런칭한다.

 

해적 컬렉션의 일부.

 

해적 영웅들의 전성시대에서 착안해 화려한 의상과 대포소리로 무대를 장식했다.

이 무렵 세간을 통해 '비대칭 패션'과 '겉옷 위에 입힌 속옷'을 서구 패션사에 처음 도입한 디자이너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맥라렌과 웨스트우드는 이 컬렉션을 계기로 상업적으로 인정받는 디자이너로 부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흙에 대한 단상(Nostalgia of Mud)을 거쳐 1983년의 마녀들(Witches)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결별하게 된다.

말콤이 펑크를 말로만 외치고 있지, 실제로는 상업만을 추구하는 장사꾼이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비록 두 사람의 인연은 여기까지지만, 두 사람의 존재는 그 자체로 펑크의 역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족적이 되었다.

여담으로 독자적인 영국 펑크의 길을 쫓던 말콤 맥라렌은, 지병으로 2010년 비비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관에는 그의 인생관인 '무난한 성공보다 스펙타클한 실패가 낫다(Better a spectacular failure, than a benign success)'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말콤 맥라렌의 무덤.

 

 

영국 패션의 대모가 되다

 

그녀는 말콤과의 작별 후로 대대적인 패션의 변화를 맞게 된다.

1984년, 별세 직전까지 인연을 지속하던 비즈니스 파트너 카를로 다마리오(Carly D'Amario)를 만난다.

그의 도움으로 그녀는 이탈리아로 활동반경을 넓혔고, 잠의 신(Hypnos)와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 서부 영화의 단골로 등장하는 배우에서 착안한 이름) 컬렉션을 런칭한다.

이탈리아의 로고와 화려한 색상들을 담는가하면, 일본의 네온사인에서 착안해 형광안료를 사용하기도 하는 등 '세계에서 가장 멋진 5대 패션쇼' 중 하나로 수상을 받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도 그녀는 전통적인 영국 의상으로부터 아이디어 착안을 놓지 않았는데, 이것이 빛을 발한 것이 1985년의 '미니 크리니'와 1987년의 '해리스 트위드' 컬렉션이었다.

 

Steven Meisel이 촬영한 이탈리아 보그의 미니 크리니 컬렉션.
1987 해리스 트위드 컬렉션 의상.

 

두 컬렉션 모두 페미닌하면서도 은근한 섹시함이 묻어난다.

(미니 크리니를 발전시켜 영국 왕실의 정통성을 융합시킨 것이 해리스 트위드다.)

미니 크리니는 독창성을 인정받아 지금의 그녀의 인지도를 만들었고, 해리스 트위드는 전통과 혁신을 결합해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다.

1989년 11월, 유명 패션 전문지 'WWD'의 편집장 존 페어차일드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칼 라거펠트', '이브 생 로랑', '크리스찬 라크르와', '엠마누엘 웅가로'와 함께 그녀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로 손꼽았다.이후에도 그녀는 지속적으로 역사적인 영국 복식을 재해석한 디자인들을 계속해서 선보였고, 마침내 1993년 조용히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신랑측의 이름은 안드레아스 크론탈러.비비안의 교수 재직 시절의 제자로, 25세 연하를 극복한 결실이었다.2016년을 기점으로는 그녀는 패션계에서 일선 물러났고, 이후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전반적으로 그녀의 남편인 안드레아스가 담당하고 있다.

 

안드레아스 크론탈러와 비비안 웨스트우드.

 

 

 

하늘의 별이 되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공식 트위터에 업로드된 추모글과 이미지.

 

그리고 2022년 12월 29일.

패션 디자이너들의 패션 디자이너.

유일무이한 펑크 디자이너.

명실상부 영국 패션계 여왕.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런던 남부 클래펌에서 가족들의 곁에서 평화로이 세상을 떠났다.

 

 

결론

 

현재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로고는 사뭇 특별하다.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ORB가 연상되는데, 이는 강력한 왕권을 상징한다.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이 심볼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녀에게 직접 작위를 수여하면서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왕실복을 현대복식에 녹여낸 실로 그녀다운 로고가 아닐 수 없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허락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로고.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생로랑 등의 명품 못지 않은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가격대는 준명품 정도의 포지션을 취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좋다.

목걸이, 지갑 같은 액세서리부터 가디건, 신발 같은 의복까지.

여성복은 물론이고 남성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관심을 가져볼만한 브랜드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미니 바스 릴리프 펜던트 목걸이.

 

그녀를 추모하는 마음에서도, 패션을 인정하는 마음에서도.

이전까지 고려하지 않았다면 장바구니 목록에 넣어보기를 권장한다.

오늘도 읽어준 독자분들께 감사를 표하며.
글을 마친다.